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빌라이 칸 (문단 편집) === 일본 원정 === 이즈음에 일어난 대삽질이라면 역시 [[원나라의 일본원정]]. 전통적으로 몽골군의 약한 수군을 뻔히 알면서도 자국보다 나름 수군이 있는 고려군만 믿고 송나라 정벌과 병행으로[* 일본의 남송 지원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원정을 추진했는데, 1274년 1차로 원정할 때 [[아라비아 반도]]까지 교역을 다니던 고려군이 바다를 더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바다를 생판 모르는 원군 지휘부가 총지휘를 맡았던 게 문제였다. [[포에니 전쟁]] 초기에도 해운국이었던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를 제치고 농경국가인 [[로마 제국]]의 군대가 연합해군 총지휘를 맡았다가 비슷하게 패배한 일이 있었다. 상륙해서 일본군에게 꽤나 강력한 타격을 몇 번 줬으며 당시 막부마저 긴장하게 만들었으나, 태풍에 쓸려 원정 함대의 1/5이 침몰하고 말았다.[* 이때 고려군 지휘관이 태풍의 징조가 있으니 상륙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바다를 모르는 원나라군 지휘부가 이를 기각하며 적의 야습 방지용으로 배에 남으라는 지휘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머지 군사로도 그냥 지르면 끝인데, 원군은 장기전을 예상하고도 이를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 피해에 깜짝 놀란 원나라 지휘부는 철수결정을 내려버렸고 이렇게 철수하다가 재수없게도 또 태풍을 만나 살아남은 함대의 절반 이상이 또 침몰해버렸다.[* 이렇게 태풍 한방으로 기적같은 대승을 거둔 가마쿠라 막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고 이로 인해 2차대전 당시 자살특공대에 붙여진 단어의 원본인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며 떠들기도 하였다.] 이는 남송이 멸망하지도 않은 시점에서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원정이 그 시절판 [[임진왜란]]이란 설도 있다. 송나라가 항복하자[* 임안 함락은 1276년이지만 남송 자체는 1273년에 [[양양(중국 도시)|양양]] 함락 뒤 이미 대규모 항복 크리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거의 멸망했다.] 당시 50만에 달하던 항복병들은 몽땅 [[기병]] 위주의 원군에 합류시키기도, 먹여살리기도 어렵고 써먹을 데도 없었고 그래서 일본 원정이 나왔다는 주장이다. 하여튼 이 일본원정 때문에 고려에선 군함을 건조하고 이들에게 먹일 군량미 모으느라 등골 빠졌다. 1차 ~ 2차를 대차게 말아먹었지만, 오히려 오기가 생긴 쿠빌라이 칸은 3차 원정을 또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3차 원정은 대월 공격을 위한 부대를 편성하면서 취소했다. 게다가 이런 원정을 수행하기 위한 재정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신하들이 죽기살기로 반대하여 끝내 쿠빌라이는 뜻을 꺾고 만다. 참고로 1차 일본 원정 실패에 이런 얘기도 있다. 사실 규슈에 상륙했을 때까지 되려 여몽 연합군 측의 기세가 엄청났고, 일본은 다 죽을 뻔했다는 것. 이건 사실로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일본은 이 정도로 대규모 병력이 싸우는 전투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군을 믿지 못한 원군은, 자기들은 배를 못 모는데 배를 잘 모는 고려군이 배 타고 자기들을 버린 채 떠날까봐 겁먹어서 여러 번의 삽질[* 낮에 진격하고 밤이 오면 진격한 걸 다 무르며 배로 되돌아오는 등]을 하며 몇날 며칠을 보내다가 끝내 태풍을 만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실상 '우연히 태풍을 만나 망했다'가 아니라 '태풍이 올 때까지 기다린' 셈이다. 이 설에 따르면 이는 우연한 원정 실패가 아니라 언제든 필연적으로 망했을 원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뒤이어 1281년, 투항한 송군 10만 명을 [[강남(중국)|강남]] ~ [[규슈]] 루트로[* '''태풍철'''에 10만 명을 이런 루트로 보낸 것이며 사실 '''가는 사이에 태풍을 안 만난 게''' 기적이다.] 원군, 고려군과 함께 원정을 보냈다. 일본 또한 1차 원정처럼 정예 사무라이 일기토하러 내보냈다가 돌격에 당하지 않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한판 크게 일어날 듯했지만 1차 원정보다 더 강력한 태풍의 힘에 수천척의 함대가 수장당했고, 가까스로 열도에 상륙한 군대는 막부군에 패배했다. 이때 고려의 배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데 남송산 배들은 피해가 엄청났으며 남송 사람들의 사보타지도 한몫했다. 이후 일본은 이 자연 현상에 '[[카미카제|신푸]](神風, 신풍)'라는 이름까지 붙였고, 이후 일본은 신이 수호하는 나라라서 결코 패망하지 않는다는 불패(不敗)와 신국(神國) 사상이 생겨났다. '신주불멸(神州不滅)'도 같은 표현. [[태평양 전쟁#s-2|태평양 전쟁]] 때 [[미국]]에게 본토를 폭격당하기 전까지는 '본토가 점령되어 패배한 적은 없다.'는 뜻에서 불패, 신국 사상이 횡행했다.[* 이 신국 사상이 일본 제국 시절에 이르러 극단화된 게 그 유명한 [[국가신토]]다. 이런 사상은 아직까지도 잔존하여 일본 극우들은 자국을 신의 나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강경파였던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21세기에 자국을 '천황 중심의 신의 나라'라고 일컬었다가 국민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쇠퇴하던 [[가마쿠라 막부]]는 이 침공의 여파로 더더욱 빨리 쇠퇴해 불과 50년 뒤 무너졌다.[* 첫 번째 원인은 너무 준비를 잘 한 나머지 '''거기에 쓸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를 위해서 많은 이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에 대한 보상을 못 줘서다.''' 당시 봉건제 사회인 일본에서 보상은 땅으로 내려줬는데 내란이라면 적군의 땅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으로 가능했지만 외적의 침공을 방어한 것은 땅을 한 평도 못 얻는지라 줄 보상이 없었다. 땅을 못 얻었으면 돈으로라도 줘야 되는데 첫째 원인에서 보이듯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돈 줄 형편도 못 되게 된 것이다. 결국 막부에게 돈 빌려주고 참전한 사람들만 바보가 된 꼴이 되어 막부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에서 오해하는 것과 달리 일본의 피해도 무시할 바는 아니었다. 규슈에 상륙한 여몽 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규슈 지역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본토 사무라이 등도 겁에 질려 패닉 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렸다. 이 때의 공포를 일본에선 '무쿠리고쿠리'(몽골, 고려)라 불렀고, 이것은 뒷날 미증유의 공포 등을 일컫는 표현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용례는 일본의 모 작가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무쿠리고쿠리의 구름'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http://shindonga.donga.com/3/all/13/114125/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